고백

- 레몬

한국어문학과
윤*영

 

타인의 상상으로 이야기는 발화된다. 보통의 사람들은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남에게 털어놓는 것으로 무게를 덜어낸다. 혼자서는 도저히 안고 있을 수 없는 것을 구토하는 것이다. 그것은 샛노란 색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아주 시큼하다. 그 사실은 그늘진 곳에서 수십 년간 방치당하다 상큼하고 새콤한 것이 아닌, 시큼하고 물큰한 불쾌감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것이 아직 엇비슷한 자리를 전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경악스러운 표정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나아가 존재 자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잔인한 이들도 있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답지 못한 공간이 된다. 냄새에는 쉽게 익숙해진다.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그만큼이나 간편하다. 아름답지 못한 세상에 익숙해지는 것 역시 간편하기만 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 시큼한 진실을 복기하며 살아내는 사람들도 있다. 명분 없는 죽음에서, 죽음을 통해 만들어진 명분을 떠안고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낸다. 노란 마음을 머금은 채로 숨을 쉰다.

평범함이 얻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평범하기 위해서는 너무 특별해서도 안 되고, 너무 이상적이어도 안 되며, ‘너무’라는 단어와 멀어져야 한다. 하지만 습관과 말투처럼 우리에게는 유난한 것들이 존재한다. 대다수가 추구하지만 대다수는 평균을 모른다. 절댓값이 없는 평(平)에 대한 탐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상과 맞닿아있다. 샛노랗고 시큼한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불평을 구토한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평균적인 평범과 얼마큼 근사할까? 도처에 분포되어 있음이 명백한 죽음은 얼마큼이 가장 평에 가까운 간격일까. 권여선의 소설 「레몬」은 이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발화된 이야기 속의 고백들은 죄다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이다. 보고 싶지 않은 남의 구토처럼. 복수와 수용과 연민과 상실 등 서로에게, 그리고 나에게 타인인 존재들은 안고 살아가는 비밀이 다르지만, 구토하는 행위로 그 비밀은 노랗고 시큼한 사실들이 된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대개는 이런 것들을 고백이라 명명한다. 꼭 잘 포장된 레몬 케이크처럼 토해내는 것은 고백이 된다. 상희는 해언의 죽음이 가까웠던 그 시간들을, 다언은 한만우를 찾아갔던 그 일련의 행동들을, 태림은 종교적인 무언가에게, 그리고 다시 또 상희로, 다언으로. 혼자만이 머금고 있기에는 너무 힘겹기만 한 물렁거림을 고백한다. 그런 것들은 잘 포장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모르는 것만큼 아는 것 역시도 많다. 알 수밖에 없는 것들 역시 존재한다. 죽음에 대한 감각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들이 부질없음 역시도 안다. 외면할 뿐이다. 해결책을 찾으려 드는 것뿐이다. 벗어나야겠다는 강렬한 욕망이, 고통이, 무뎌질 때쯤에서야 비로소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기에. 알다시피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그러니 아름답지 않은 사실들이 조금 늘어난다 하여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테다. 시큼하고 무른 레몬. 그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아도 좋다.


[소감문]

수상 소식을 전해 들은 직후,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전산 오류는 아닐까, 잘못 온 연락은 아닐까, 하지 않아도 될 걱정들을 밤새 머금고 나서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 뒤에는 정말로 뿌듯했다. 무언가를 증명해냈다는 막연한 긍정이 차오르기도 했다.
물론 우연이 불러온 행운일지도 모른다. 하나라는 작은 숫자가 전체를 증명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회신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두드림에 응답해 준 작은 진동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되새겨 보면 현장감은 나에게 굉장히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넓은 강의실, 시험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 집중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많은 사람들과 그 분위기는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열기가 나라는 사람을 동요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은 글을 다시 한 번 정제할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나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이 대회 자체와 관계자분들, 그리고 참여한 모든 학생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