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나도 아직 모르는 게 많단다

- 나의 할머니에게

사회학과
백*은

 

생애란 죽음으로 가는 긴 여정이라는 비유를 굳게 믿고 있는 나는 언젠가 “살아가는 죽음”이라는 표현을 떠올린 적이 있다. 어찌 보면 모순일 수도 있을 이 말은 행복하게 살아내고 싶다는 욕망과 결국 어떤 삶이든 죽음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허무함이 맞닿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그러니 곧바로 “삶은 죽어가는 과정이야.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면 그뿐이야.”라는 어떤 영화의 대사를 떠올리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거다. 내 생각과 영화의 대사 사이에서 태어난 철학에 깊이 공감했던 그 날의 일기는 꽤 길었고, 꽤 심오했다. 우울과 축축함이 진하게 묻어나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우울과 축축함 사이에서도 영원하지 않음이 줄 수 있는 생명력을 여전히 사랑하며, 그 힘을 믿고 있다는 일종의 희망도 집어넣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함이란 죽음과도 같다.”라는 내가 사랑하는 작가님의 한 마디도 함께 썼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 그렇지. 완벽할 수 없이 요철이 가득한 생애는 지난한 슬픔과 찰나의 행복을 동반하겠지. 이제 겨우 스물한 해를 살아낸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이런 이유로 나는 “늙은 여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어찌어찌 살았을 뿐이다.”라는 구절에 가장 진한 여운을 맛봤다. 중력에 짓눌려 늙어버린 신체를 탓할 기력도 없는 지친 여자들을 떠올리는 건 유쾌하지 않다. 여기서 유쾌함의 부재란, ‘젊음’에서 생겨난 오만이 아니라 늙은 나를 상상하면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에 가깝다. 지금이야 적당히 슬퍼할 줄도, 적당히 기뻐할 줄도 모르고 그저 몸이 이끄는 대로 표출하는 내 모습을 젊다는 이유만으로 유하게 넘길 수 있지만, 젊지 않은 나는 그런 유한 시선을 쉽게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낡은 신체를 향해 쏟아질 뻣뻣한 시선들. 그 시선들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할 그때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민아 할머니처럼, 정말로 죽음을 진심으로 갈망하게 될까.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 다만 확실한 건, 우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푸석하고 유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얼만큼을 살았든, 새롭고도 달콤한 감각들을 생경하게 느낄 수 있는 영혼의 나이가 껍데기에 불과한 신체의 나이와 언제나 같을 수 있을까. 영혼의 나이를 아는, 그러니까 그런 신체와 영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느린 걸음과 요란스럽지 않은 몸짓을 ‘어른의 표본’으로만 여길 순수함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일 것이다. 얘야, 나도 아직 모르는 게 많단다. 하지만 그 순간의 ‘모름’이란 무지의 동의어가 아니라, 아직 느껴보지 못한 것들을 비교적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삶과 죽음 사이에서 생겨날 무수한 문제와 함께 경험하게 될 ‘모름’은 어쩌면 죽음으로 향하는 생애의 따분함을 견디게 해줄 또 다른 사랑의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각자만의 시간과 해석을 타고 피어날 모습이란 이다지도 자연스럽고 무겁지 않은 질문들을 던져줄 것이다.


[소감문]

여성 캐릭터를 중점으로 한 서사들을 다룬 제 글이 상을 받게 되어 굉장히 기쁩니다. 단순히 표지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했던 책에서 예상치 못한 많은 즐거움과 위로를 받아서, 텍스트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뻗어나갈 수 있는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제 인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아주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진리가 될 것 같습니다. 문득 우리 같이 귀여운 할머니가 되자는 예술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제가 스스로 나이가 드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며, 우리 모두는 살아낸 시간과 관계없이 모두 유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기대어 살아야 함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