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문리라는 조그만 마을은 냉전의 역사 한복판에서 판문점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 미국과 함께 휴전협정의 당사국이었던 중국을 배려한 결과였다. 격동하는 세계의 정세를 읽어내지 못한 무능으로 외세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여전히 그 지정학적인 판도를 읽어내지 못하고 내분으로 치닫다가 분단의 형벌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육십여 년이 지난 어느 봄날, 한반도의 두 정상이 손을 맞잡은 그 때에 전 세계의 이목이 판문점으로 모아졌다. 서구의 위세에 중화의 질서가 휘청거릴 때에도 세상 모르고 안일하였던 이 나라의 통치자들. 지금의 저 역사적 만남은 여러 상념들을 불러온다.
황석영의 ??손님??은 한반도 현대사의 비극적 기원을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외래의 이데올로기에서 찾았다. 그러니까 이 나라의 근세란 바로 바로 그 역병의 창궐과 더불어 개시되었다. 여러 역병 중에서도 제국주의의 숙주로 들어온 기독교의 서세동점이야말로 동아시아의 근세를 규정하는 가장 중한 사건이었다. 지금도 한반도 남쪽의 어느 한쪽에는 십자가와 함께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복음을 갈구하는 이들이 여전하지 않은가.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중국을 공략했는가??는 바로 그 동점의 서세적 기원을 더듬을 수 있게 해 주는, 대단히 잘 정리된 역사 교양서이다. 여기서 중국을 특정한 국가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서세로부터 곤욕을 치른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책의 제목에서 ‘공략’이라는 노골적인 어휘가 두드러진 만큼, 동서의 문명교류를 바라보는 저자의 견해는 지극히 선명하다. 그러니까 그 교류란 조화로운 교섭의 과정이 아니라 일방적인 침투의 과정이었다는 것.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밝히건대, 이 책은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를 비난하는 그런 저작이 아니다. 중국을 일개 국가가 아닌 피식민의 동아시아로 보아야 한다고 한 것처럼, 여기서 기독교는 서구의 제국주의로 보는 것이 마땅하겠다. 그러므로 이 책은 마테오 리치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의 선교 역사와 그 논리에 잠복해 있는 침략주의를 파헤친 탈식민주의적 저작으로 읽을 수 있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는 위로부터의 개종을 실행하기 위해 지배층의 종교인 유교의 가면을 쓰고, 당대 민중의 삶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불교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신유학의 무신론을 부정하고 선진유학의 상제(上帝)를 천주(天主)로 환원한 그 전략은 미숙한 논리와 무리한 적용으로 당대의 유가뿐 아니라 교황청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천주교에 개방적이었던 조선조 남인 계열 지식인들의 사상적 고뇌 속에서도 그 복잡한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바, 상제를 방편으로 중세 주자학의 극복을 기도했던 그 기획이 근대적인 지향이었는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공략에 다름 아니었던 예수회의 선교는 끝내 실패하였고, 오히려 그 선교의 경험이 유럽에 중국열을 불러일으켜 계몽주의를 발아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중국의 우수한 문화가 오히려 유럽의 근대에 영향을 끼쳤다는 과감한 논리.
편저에 가깝다는 저자의 솔직한 고백처럼, 이 책은 기존의 연구들을 적절하게 편집한 것이다. 그래서 동서 문명의 교류사에 대한 개설적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장점과 함께 논쟁으로 비화될 과감한 주장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과감한 논의가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국으로 남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정세와 판도를 읽어내는 나름의 교양적 근거가 된다면 어떠한가. 서구적 시각이 아닌 자기의 시각이 중요하다는 말이다.